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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본문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은 대량학살(genocide)의 주범이라고 불려지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보고서를 내용으로 담고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출간전부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특히 부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보면 어느정도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량학살의 공범으로 주목받는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익명의 타인신분으로 지내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부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1961년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미국 신문사 뉴요커의 기자신분으로 재판에 대해 취재한 내용을 기사화하였고, 이를 책자화 하였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재판 보고서의 내용을 활용해 이스라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바라보는 관점, 이스라엘 법정의 정의의 관점에서 당위성 여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이히만의 납치, 이스라엘에서의 재판, 2차 세계대전 당시 제3제국에 의한 유대인 대량학살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이 재판 보고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 정치적, 이념적 관점이 아닌 아이히만을 둘러싼 재판의 공정성과 정의의 관점에서 봐야한다고 언급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이 책에서 아이히만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에 대한 책임을 축소하는 것 같아 거북해 보이고(사실 이스라엘 정부는 정치적으로 아이히만에게 대량학살의 책임을 전부 부과하고 싶음),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한 부적절성(차라리 납치대신 아르헨티나 현장에서 죽이는게 낫을 수 있다. 사형이 재판하기 전에 이미 확정된, 사형을 위한 법정 진술과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재판 등등) 등을 언급하는 것 같아 민감할 듯 보인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의 책은 2000년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출간된 적이 없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 보고서는 예루살렘 법정이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가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 라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이 재판이 오직 정의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이루어져야 했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고 또 지금도 갖고 있다' p390
나는 재판에 직면한 한 사람이 주연한 현상을 엄격한 사실적 차원에서만 지적하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멕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차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p391
그가 행한 모든 일은 그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서 인식한 만큼 행동한 것이었다. 그는 경찰과 법정에서 계속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의무를 준수했다. 그는 명령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법을 지키기도 했다. p209
이후 아이히만의 최종 언도가 나왔다. 정의에 대한 그의 희망들은 무산되었다. 비록 그가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법정은 그를 믿지 않았다. 법정은 그를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책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제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해 달라고 소환할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살이나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자기들을 '떠나거나, 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다. 그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르바티우스가 한 말을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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